옛날에는 각 급 학교에서 악대부가 있어서 음악을 배우고 또 실습할 기회가 많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작금에 주변에 학교는 물론이고 악대부가 있는 곳은 정말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것 같다. 옛날의 선비들도 지금처럼 대학에 들어가는 데 목을 맷을까? 당시에도 성균관이나 향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부단한 공부를 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공부시키는 부모의 마음을 똑 같았을 것 같다. 교육교재를 보면 역사는 물론이고 음악을 비롯한 운동(무술)과 잡과도 모두 섭렵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 나온 말이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나온다고 했었나 보다. 우리지역의 명유(名儒)인 탁영선생이 사용하였던 거문고가 보물로 지정되어 대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을 보면 당시에는 선비가 악기를 잘 다루었다는 말이 증명이 된다. 청도선인들의 기록인 유람록을 보면 대부분 악동이나 기생을 데리고 가면서 음악을 연주하고 시를 읊었던 것을 볼 수 있는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요즘 젊은이 들을 보면 신체는 건장해 보이지만 정신은 예전처럼 악과 깡이 없는 것 같다. 악으로 깡으로라는 말은 악(樂)은 음악으로 깡(强)은 굳세게 라는 뜻이 된다. 지난날 군대에서 유격훈련을 받을 때 군가를 하면서 “요령을 악으로 깡”으로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다. 음악은 신명을 나게 만들고 강하게 만든다. 신명은 목숨을 즐겁게 버릴 수 있을 정도로 힘을 북돋아 준다는 말이 된다. 이번에 문화원에서 옛날 궁중에서 전통적으로 전해오는 대취타강좌를 개설했다. 대취타는 소취타와 취타에 대비되는 말로서 그 구성원과 장소에 따라 이름이 달라진다고 한다. 그러면 대취타에 대해서 사전적 의미를 한번 나열해 보자. 대취타(大吹打)를 아명(雅名)으로는 <무령지곡 武寧之曲>, 속명으로는 <대취타>, 세칭 <구군악 舊軍樂>이라고도 부른다. 선전관청과 도성(都城)의 5영문(五營門)에는 대취타를 상설했으며, 각 지방의 감영·병영·수영에도 두었고, 각 고을에는 <소취타>를 두었다고 한다. <대취타>는 임금님의 노부(鹵簿:임금님이 거둥할 때의 의장, 또는 의장을 갖춘 행렬)·행행(幸行)·능행(陵幸:임금님이 친히 능에 행차하는 것), 왕실(王室)의 동가(動駕:임금님이 탄 수레가 대궐 밖으로 나가는 것) 등에 사용되었음은 물론, 군대의 행진 및 개선, 주장(主將)의 좌기(坐起:출근하여 사무를 보던 일), 진문(陣門)을 열고 닫을 때, 통신사의 행렬 때, <검기무 劒器舞>·<선유락 船遊樂>·<항장무 項莊舞> 등의 정재(呈才)에 쓰였다고 한다. 취타(吹打)라는 의미(意味)는 부는 악기[吹樂器]와 치는 악기[打樂器]의 연주를 말하며, 이러한 특유의 연주형태로 연주되는 음악까지를 포함하여 말하는 것이다. <대취타(大吹打)>의 악기 편성은 시대와 의식(儀式)의 규모에 따라 다르나, 현재 연주되고 있는 악기편성은 태평소(太平簫)만이 유일하게 선율(旋律)을 연주하는 부는 악기이며, 나발(喇叭)·나각(螺角:소라) 등 일정하지 않은 단음을 단조롭게 부는 악기와 북·장구·징·자바라(啫哱囉) 등 선류이 없이 치는 악기(無律打樂器)들로 구성된다. 대취타에는 연주자 외에 시작과 끝을 알리는 집사(執事)가 있다. 집사를 우리말로 하면 지휘자로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것 같다. <대취타>의 연주가 시작되기 전에 집사가 ‘등채(지휘봉)’를 두 손으로 받쳐들었다가 오른손으로 쥐고 머리 위로 높이 들고서 “명금일하대취타(鳴金一下大吹打)” 하고 구령을 하면 징을 한번치고 연주가 시작된다. 대취타대의 복장을 보면 작우(雀羽 꿩의 깃) 꽂힌 초립(草笠)을 쓰고 황색 빛깔의 철릭(天翼)을 입고 푸른색의 허리띠(藍纏帶)를 띤다. 대취타의 악기 는 용이 그려진 북(龍鼓)·징·자바라(啫哱囉: 바라라고 부르는 제금)·장고 같은 타악기 및 나각(螺角: 소라)·나발·태평소(太平簫: 날라리·호적) 같은 관악기로 편성된다. 이들은 지휘자의 “명금일하대취타(鳴金一下大吹打)” 라는 구령에 따라 일제히 연주를 시작한다. “명금일하(鳴金一下)”는 쇠를 한번 울리고 취타를 시작하라는 말이다. 이번에 개설된 강좌는 청도에 큰 행사가 있을 때 연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강좌의 가장 큰 목표이다. 옛날에 지역에 축제가 있을 때 항상 풍악을 울리면서 가장행렬이 뒤따랐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우리네 축제는 주민이 참여하여 만드는 축제는 사라졌다. 가장행렬은 간곳이 없고, 막걸리 한 사발에 얼큰하게 취한 뒤 축제마당에서 어깨춤을 추고 놀 여력이 없이 늙어 버린 것이 아닌가 하여 안타깝기 그지없다. 요즘 우리지역에 행사가 있을 때 마다 참여하는 인원이 아니고 동원된 인원이기 때문이 아닌가 하여 아쉽기도 하다. 올해도 가을이 오면 어김없이 축제가 벌어질 것인데 누구를 위한 행사가 될 것 인가를 생각해 보면 격세지감을 갖게 한다. 대취타대가 양성되어 축제 마당의 길라잡이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