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23년 전인 1993년도 경상북도에서 시행하는 고향말씨 자랑대회에 있었던 이야기 이다. 풍각면 흑석2리 (석통)에 살고 있는 박지금씨는 입담이 좋기로 주변에 소문이 나 있었다. 1993년도 경상북도에서 내고장 말씨 자랑대회(사투리 경연대회)에 참여할 사람을 찾을 때 당시 풍각면장 (고) 강준석씨가 입담이 좋은 박지금씨에게 찾아 와서는 이번 대회에 참여해서 좋은 성적을 거두어 주세요. 하고 부탁을 하였다. 박지금씨는 내가 어디가면 농담은 잘 하지만 뭔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지도 못하고 어떡해 해야 하나 하고 한 이틀을 고민을 하다가. 그래, 그래도 면장님이 부탁을 하니 한번 해보자 생각하고, 안국에 살고 있던 촌장(고)양재화씨에게 부탁을 했다. 이 어른은 뭔가 뼈대를 만들어 주실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을 가지고 양재화씨를 찾아 갔는데, 양재화씨는 당시에 보기 드믄 재주많은 분이었다. 다짜고짜 찾아 가서 제가 이번에 이러이러한 부탁을 받았는데 이야기 골격을 하나 만들어 주십시오. 골격만 만들어 주시면 살을 붙이고 말을 하는 것은 제가 하겠습니다. 하고 부탁 드렸더니 “내가 아는게 뭐 있나” 하시면서 그 자리에서 글을 바로 적어주시었다. 글을 주시려고 해도 당시에는 마땅하게 적을 종이도 준비 된 것이 없었다. 주위를 살펴보시더니 벽에 걸려있는 달력을 한 장 북 찢어서 이야기를 하나 만들어 주시는데 각북면 우산리에 전해 오는 천급제가 백석지기살림 이룬 이야기를 하나 만들어 주시는 것이었다. 그것을 가지고 집에 와서 살을 부치고 뼈를 다듬어 몇날 며칠을 어디를 가나 오고 가면서 오토바이에 꼽아놓고 읽고 외우고 말을 만들어 경산에서 시행하는 사투리 경연대회에 참여하여 예선에서 1등을 하였다. 1등을 하고 보니 구미에서 시행하는 본선에 나가라고 준비하라고 했다. 1등을 하고 보니 자신감이 붙어서 열심히 한번 해보자 하고 준비했다. 본선에 나갈 때 당시에 승용차가 흔하지 않은 시절이라 청도군청에 공보실장이 군청공보실차를 가지고 와서 함께 구미종합 체육관으로 갔다. 가면서 공보실장에게 말하기를 내가 만약 경연대회에서 1등을 하면 부탁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하고 말했더니 1등만 하세요. 1등만 하면 뭐든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해 드리겠습니다. 하였다. 그 말에 용기를 얻어서 열심히 하여 대상은 못 받고 차상인 금상을 받았다. 당시 대상은 상금이 1백만원이고 금상은 70만원이었는데 금상으로 70만원을 받아 집에 와서 생각해보니 이 상은 내가 받을 것이 아니고 골격을 만들어주신 양재화씨 것이다. 싶어 양재화씨에게 10만원을 갔다 드렸드니 야 이 사람이 이것이 뭐꼬 하시면서 10만원은 많다. 너무 많다. 하시면서도 고맙게 받으셨다고 한다. 그러고 나니 친구들이 축하 한다면서 술 한 잔 사야 하지 않느냐고 해서 친구들에게 술 사주고 나니 상금은 한 푼도 남은 것이 없었다. 당시에 공보실장께서 뭘 부탁 할 려고 했느냐고 물어왔다. 제가 부탁 할 것이 무엇인고? 하면, 우리 오졸재 할아버지 비석하고 비각을 문화재로 좀 만들어 주소하고 말했다. 박한주 선생의 비각은 차산과 석통마을 경계에 있는데 이 비각 수호를 매번 석통 경석재에서 해 오고 있었다. 비각이 허물어지거나 누수가 생기면 그때마다 석통이 주축이 되고 차산문중과 흑석문중에서 기금을 갹출해서 보수를 하였다. 박지금씨의 어른(박재훈)께서 늘 상 이 비석과 재각이 문화재로 등록하는 것, 그것이 내 마지막 할 일이다, 라고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는데. 몇 년 전 국회의원 선거 때 각북 남산이 고향인 박 모(某)씨가 출마를 하게 되었다. 당시 한약방을 하고 있던 박재훈씨는 일가가 국회의원에 나왔으니 일가가 모두 도와주어야 된다면서 한약방을 잠시 문을 닫고 국회의원 선거운동을 열심히 하고 다녔다고 한다. 당신 개인 돈을 써 가면서 국회의원 운동을 하여 당선이 되니 본인이 국회의원에 당선된 것 보다도 더 기뻐하셨단다. 또 마침 국회 문공위원장이 되었으니 이 비석과 비각을 문화재로 만드는 것은 따논 당상이라는 생각에 한걸음에 서울로 달려갔다. 가서 여차저차 찾아 왔노라고 말했는데 시원한 답을 얻지 못하고 내려 와서는 ○○이 이놈 참 고연 놈이라고 몇 번이고 말을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는 비석과 비각이 문화재로 등재가 못되고 세상을 떠나셨으니 아들인 이 비석이 나 혼자의 조상인가 저도 같은 손자이면서 하면서 매우 섭섭해 했다고 한다. 그러다 문화재로 등록을 마치지 못 한채 눈을 감고 말았다. 이에 박지금씨는 이 일은 아버지가 할려고 하던 일인데 아버지가 마치지 못했으니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생각하고 공보실장에게 부탁을 한 것이었다. 그 해에 청도군에서 신청하여 다음해에 경상북도 기념물 제104호로 지정되었으니 아버지의 소원을 내가 들어 드린 것이다. 하고는 자부심을 갖는다. 박지금씨는 평소에 늘 하는 이야기가 내가 둘짼데 형님은 대학을 마치고 부산에서 한의사를 하고 있고 동생은 학교공부를 많이 하여서 월급쟁이를 하고 있지만 아버지가 나를 국민학교 밖에 안 시켜서 촌에서 농사를 짓고 산다는 말을 하고 있다. 하지만 굽은 나무가 산 지킨다고 국민학교 밖에 안 다녔지만 아버지께서 매번 문중일만 있으면 데리고 다녀서 문중에 일들을 환하게 다 기억하고 있다. 지금도 문중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고 있다. 박지금씨를 보면서 생각한 것이 효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 아버지가 하고자 하는 일을 이어하는 것이 진정한 효자가 아닌가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