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또한 일말의 가치도 없는 것이 현재 필자가 쓰는 글이다. 그래서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란 생각을 하지만 그래도 혹여 관심이 있는 분들의 참고가 될까 하여 발췌해서 적어 본다. 혹 족보에 보면 조상(祖上)중에 찰방이란 벼슬을 하였다는 글이 보인다. 그런대 막상 찰방의 벼슬은 어느 정도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가?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없지 않다. 찰방은 조선시대 각 도의 역참을 관리하던 종6품의 외관직으로 이전의 고려 때부터 내려오는 역승(驛丞)제도가 있었는데 1535년 (중종30)에는 예전 고려 때의 역승제도가 완전히 폐지되고 찰방체제로 바뀌었다. 서울을 중심으로 각 지방에 이르는 중요한 도로에 마필(馬匹)과 관원을 두어 공문서를 전달하고 공용여행자의 편의를 도모하게 한 기관을 역참이라 하였으며 약간의 역참을 1구역으로 하여 이를 역도(驛道)라 하고 그 구간의 말과 역졸을 두고 그 일을 맡아 보는 관직을 찰방(察訪)이라고 하였다. 《경국대전》에 수록된 전국의 역참조직은 41개의 역도(驛道)가 있었으며, 524개의 속역(屬驛)이 있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현재의 경찰서가 약 524개 전후로 된 것은 옛날의 것과 별 다르지 않다고 생각된다. 우리나라 총 역리졸(驛吏卒)의 숫자는 얼마나 되었을까.? 131.859명의 역리졸(驛吏卒)가 있었고 역마(驛馬)의 숫자는 모두 5.380마리의 말이 있었다. 그 중에 우리 청도가 속해있는 경상좌도의 역참(驛站)은 모두 70개였고 역리는 18.793명이었다. 말의 숫자는 787마리의 말이 있었다고 《만직요람(萬稷要覽)》에는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 청도의 옛 역도(驛道)인 성현(省峴)역에는 어느 정도의 역참(驛站)과 역리졸(驛吏卒)이 있었을까. 성현역에 소속되었던 역참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1. 용가(龍駕=밀양), 2.쌍산(雙山=현풍). 3.내야(內野=창녕). 4.일문(一門=영산) 5. 범어(凡於=대구). 6.유천(楡川=청도).7. 설화(舌化=대구), 8.금동(金洞=밀양) 9. 양동(良洞=밀양).10.영안(永安=밀양) 11. 온정(溫井=영산). 12, 오서(鰲西=청도). 13.매전(買田=청도).14. 무흘(無訖=밀양) 15.유산(幽山=대구).16서지(西芝=청도) 도합 16개의 속역과 역졸의 숫자 999명을 성현도 찰방이 관리한 숫자이다. 역참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국가의 명령인 공무서 전달이다. 중앙과 지방 각 군·현간의 정령(政令)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 기능은 공부(貢賦). 진상(進上)등의 관수물자(官需物資)를 운송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사신왕래에 따른 영송과 접대이다. 중국,이나 일본의 사행은 물론 왕명을 받들어 각 지방에 파견된 봉명사객(奉命使客)을 영송하고 접대하는 것은 외교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행정적인 면에서도 매우 중요하였다. 네 번째 역호(驛戶)또는 마호(馬戶)를 편성하여 역마를 입대(立待=준비하여 대비시킴)하는 일이다. 역참은 이와 같은 기능 외에 죄인을 체포 압송하거나 통행인을 규찰하고 유사시에는 국방의 일익까지 담당하였다. 특히 변방의 긴급한 군사 정보나 외교문서를 전달하는 일은 완급에 따라 국가의 이익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조선시대의 역(驛)· 참(站) 관(館)의 구별에 따라 역민의 명칭도 달랐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의 일하는 모습은 비슷하였다고 하는데 역의 최고 책임자는 종6품인 찰방이 여러 개의 역을 총괄하였다. 역리는 조선 초기에 지배 신분층의 분화와 관련하여 향리에서 많이 정속(定屬=역리로 소속시킴)하게 하였으며, 관군(館軍)과 더불어 양인(良人)의 신분에 속하였다. 대개 역 운영을 전담한 이속(吏屬)으로서 사신영송(使臣迎送)과 역마보급(驛馬補給) 공문서(公文書) 발송(發送) 등 잡무(雜務)에 시달렸기 때문에 천인(賤人)과 다름이 없을 정도로 인식되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역리의 신분과 일하는 형태는 많은 변화를 보인다. 그 이유로 첫째는 역리의 통혼(通婚)에 의한 역리 인구의 증가와. 둘째 양역을 기피하고 역속(驛屬:역관에 소속됨)으로 투탁(投託: 남의 권세에 자신을 의탁함.)하는 현상. 셋째 역노승리법(驛奴陞吏法:관노비가 역리로 신분상승을 하는 법)넷째 군공(軍功) 및 부거(赴擧:과거를 봄)를 통하여 관료로의 진출 등을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신분상승제도에 의해서였던지 성현역 주변도로에는 수많은 찰방에 대한 공덕비가 즐비하게 있었다. 선정을 표면화하여 자기의 신분을 상승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하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성현역지에 보면 이두문(吏讀文)형식으로 기록한 것을 보면 문서체가 공부(貢賦)나 진상(進上)물품을 적은 글들과 유사한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에 있던 비석들은 지금 청도읍성(화양읍 동상리)앞에 몇 기가 있고 남성현 출창소 신청사 옆에 1기 가있을 뿐 나머지는 새로 길을 내면서 모두 매몰하였다고 하는데 지금 남성현 주유소 앞 도로에 그리고 옛 길옆에 묻혀있다는 제보가 있어 도로 옆 배수로 공사 때 발굴해보자고 하였으나 아무런 대책이 없어 그대로 매몰되어 있다. 우리나라 역참의 설치 기준은 대부분 중국 명나라의 척관법(尺貫法)에 따라 주척(周尺)을 사용하였으며, 6척(尺=자)를 1보(步=한발)로 하여 360보를 1리로 하였다. 매 10리마다 소후(小?)와 30리마다 대후(大?=봉화대)를 세우고 30리를 1식(息)이라 하여 약 30리마다. 1개의 역(驛)을 설치하였다. 뿐만 아니라 현령협판(懸鈴俠板)에 의한 공문서 전달 방식과 역노비를 설치하였다. 포말기발법과 마패에 의한 역마이용. 그리고 역의 중요도에 따라 역전을 나누어 줌으로써 역(驛)의 행정을 원활하게 하였다. 한편 육상교통의 편의를 위하여 중요한 강가에 진도(津渡)를 설치하고 도승(渡丞)을 두어 왕래인을 살피기도 하고 사신등의 지방 순행에 편리하도록 도선(渡船)을 준비해 두기도 했다고 한다. 이러한 모든 것은 찰방이 관할하였다 현재로 견주어 말하면 경찰서장과 예비군 대대장을 포함한 정도의 권력이 있지 않았을까 미루어 짐작이 된다. 성현역지에 보면 성현도 찰방은 전근되어 갈 때 승급(昇級)하여 현감이나 현령으로 가는 수가 많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