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반세기전 까지만 해도 시골에서는 몸이 아프거나 음식을 잘못 먹어 구역질이 심할 경우에는 객귀가 들었다 하여 “객귀 물리는 의식”을 행하였다. 나도 유년시절 몸이 부실하여 이런 증세가 가끔 발생하면 어머니께서는 당숙모님을 모셔 와서 객귀를 물린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는 요즘 같지 않아 시골에는 병원과 약국이 거의 없는 처지라서 객귀 물리는 의식을 치러야 했던 것이다. 객귀 들린 당사자는 영락없는 죄인 취급을 받아야 했다. 무릎을 꿇게 하고 당숙모님께서는 새로 길러온 물을 한 바가지 담아 내 턱 밑에다 받치고 부엌칼로 이리저리 얼러가며 하늘의 천신, 땅의 지신, 동해 용왕님께 빌고 불쌍한 중생에 붙은 객귀가 물러가라고 호령이 시작되고 닭 털 뜯기듯 머리카락을 한줌 뜯을 때는 눈에 불이 번쩍 난다. 목메어 죽은 처녀귀신, 쉰 길 흙탕물에 빠져죽은 청상 귀신, 짝사랑하다죽은 몽달귀신... 온갖 잡귀들을 다 불러 물리치는 황당한 의식이 끝날 때까지 꿈적도 못하고 눈물만 찔끔거려야 했던 것이다. 상황이 끝날 즈음이면 바가지에 침을 세 번 뱉게 하고 칼을 대문으로 향하여 돌려 던진다. 그때 칼끝이 대문 쪽으로 향하게 되면 오늘 객귀가 잘 물리셨다고 하시며 그 자리에 열십자를 긋고 칼날을 대문 쪽으로 하고 + 자 가운데 칼을 꽂는다. 객귀물린 물은 대문 밖으로 “모든 잡귀 들은 썩 물러가라”하며 뿌리고 빈 바가지를 땅에 꽂힌 부엌칼 손잡이 위에 엎어 쉬우고 나서 객귀물린 당사자를 방에 눕히면 모든 의식이 끝이 나는 것이다. 어찌된 일인지 객귀만 물리고 나면 아픔이 가시고 해서 어릴 때 잔병이 잦은 나는 당숙모님의 신세를 많이 졌던 기억이 난다. 그렇다고 그분이 신神내림을 받은 분도 아닌데 평소에 입담이 좋으시고 인정이 많으셨던 분으로 대 소가나 마을 이웃에게도 항상 인정을 베풀면서 사신 분으로 기억하고 지금도 음식을 잘 못 먹고 체하든가 하면 당숙모님의 그 처방 술이 정말 신기하다고 그때 그날을 회상한다. 종심從心이 넘은 내가 올해도 서산으로 기울어 가는데 낙엽처럼 쌓이기만 하는 덧없는 내 연륜을 반추 하며 문득 지나온 옛길을 뒤돌아보니 고향의 흔적들은 문명의 발톱에 무참히 할퀸 채 무정한 세월의 이끼만 더할 뿐인데 우리 인간사도 그처럼 덧없는 생성과 소멸의 연속이 아니던가. 돌아보면 혼돈과 상실, 더러는 인간에 절망하며 힘겨운 삶의 궤적軌跡들이 눈에 밟히기만 한다. 고향에 갈 때마다 정답던 얼굴들은 하나 둘 사라지고 온통 흩어져 눈에 젖는 고향이지만 그래도 나에겐 가물거리는 호롱불 같고, 다독일수록 되살아나는 아련한 불씨 같은 것들이다. 기쁨보다는 고달픔이 더했던 내 유년이었지만 우리가 떠나고 먼 훗날 다시 태어난다면 산 좋고 물 맑았던 그 옛날의 내 고향집 초가삼간에서 오붓한 유년의 꿈을 점지 받기를 원한다. 나를 키우며 내 곁을 스쳐간 유년의 고향 한밭, 굴뚝의 연기가 피어오를 때면 가마솥에는 밥 익는 구수한 냄새며 마당에 피워놓은 모깃불의 연기가 매워 눈을 비비면서도 넓은 평상 위에 누워서 하늘의 은하수와 북두칠성, 내 몸에 쏟아지는 아름다운 별들의 숨결 성찬이 끝나고 우물에서 건져 온 여름과일들이 내 마음의 풍요로움을 더해준다. 또한 계절이 가을이 되면 억새풀 날리던 고향 언덕을 그리며 두고 온 지난날을 가슴으로 껴안고 싶다. 누구나 갈 때가 되면 고향을 떠올리는 것이 인지상정이 아니겠는가. 세상에 올 때는 순서가 있지만 갈 때는 순서가 없고 더러는 순서를 어기고 새치기 하는 이들도 가끔 있지만, 그것은 엄연한 반칙인 것이다. 하느님의 부르시는 순서는 그분 마음에 있는 것이다. 지금도 향수에 젖을 때면 내 유년시절 객귀 물리시던 당숙모님의 낭랑朗朗한 그 음성이 귀에 들리는 듯하다. 내 고향 한밭에 변하지 않은 것은 400년의 나이를 먹고도 꿋꿋하게 고향을 지키고 있는 은행나무의 고고한 그 자태는 마을의 수호신이기도 하다. *한밭 : 경북 청도군 이서면 대전리(한밭)은 필자의 고향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