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인터넷청도신문 | | 명절이 되면 제사를 모시기 위해서 시골, 집으로, 집으로 길이 비좁도록 모여드는 것이 현재 우리들의 모습이다. 옛 집은 노부모가 지키고 살면서 자식들이 명절날 찾아 와주기만을 학 수 고대하고 있는 것이 요즘의 세태이다. 1년에 고작 몇 번 부모를 찾는 것은 제사를 모시기 위해서 인가? 부모님안부가 걱정이 되어서 인가? 반문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예전에는 종손 집에서 제사를 준비하고 또 모든 것이 그 곳에서 시작을 하였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핵가족화가 되고 도시화가 되어서 이제는 어느 집에서든 남의 식구와 밤을 함께 지샌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부모가 계실 땐 형제지간이지만 나에게 딸린 식구가 생기면 남이 된다. 그래서 한 다리가 천리라고 하였던가? 한 정재 8촌 난다는 옛 대가족 문화가 없어진지 오래다. 따라서 가족관계의 옛 문화도 사라져 버려 안타깝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시골집, 부모님은 무엇인가? 형제간에 만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다리다. 다리라고 해본 것은 부모님은 돌아가셔도 형제들 간에 만날 수 있는 날을 만들어 준 것이 제사 날이기 때문에 붙여본 것이다. 해방이후 근대화를 시작하면서 산아제한을 하였고 그러다 보니 형제가 많지 않다. 불과 40여년전만 해도 평균 5~6남매였던 대 가족이 이제는 핵가족화가 되면서 둘 아니면 하나 아들. 딸을 낳아서 기른다. 처음엔 배고픈 것을 줄이기 위해서 산아제한을 하였는데 불과 반세기가 지난 지금 부작용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학교에서는 학교폭력과 왕따 그리고 사회에서는 위계질서가 무너지고 가정에서도 그야말로 핵이 되어서 노부모 봉양할 자손(子孫)이 없는 것이 안타깝다. 그래서 우후죽순 생겨나는 것이 요양병원이다. 물론 어쩔 수 없어 이곳으로 모시는 경우도 상당하리라 믿는다.
예전에 종손이나 맏이는 대단한 존중의 대상이고 또한 그 권력도 상당했다. 사전적 의미로의 종손은 한 문중 또는 동족의 최고조상의 직계손이나 대종중의 적장자손이거나 지파조의 직계손 장자(長子)를 말한다. 라고 하고 있다. 조선시대 종손의 지위는 종가의 권위에 비례하여 최고로 존중받는 위치였다. 종법상으로는 배행주의(輩行主義)보다는 적계주의(嫡系主義)원칙이 확립되었으며 경제적으로는 위토와 금양임야(禁養林野)의 소유권이 종손에게 계승되었고 사회적으로도 종손은 명망 높은 조상의 후손으로 사회적 신분과 종가와 서원(書院) 그리고 가묘(家廟)등의 소유자로 위세를 세습 받았기 때문이다. 한편 전통사회에서 지손(支孫)들은 보종관념(補宗觀念)을 투철하게 가지고 있었다. 종손이 가난할 땐 전 문중이 협력하여 모금을 하거나 부조를 하였고 자식이 없으면 차자의 장자로 대를 잇게 하였다. 오늘날 민주화·산업화·도시화의 영향으로 종손의 사회적 지위가 급격히 하락하였지만 아직까지는 관습상의 영향은 그대로 남아 있어 책임과 역할을 기대하는 집안이 많다.
여기 운문면 지촌리에 종손을 소중하게 생각했던 시대에 산물인 재실이 있다. ‘지촌리’ 산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지명조차 생소하리라 생각된다.
청도는 동서로 상당히 길다. 따라서 서쪽에 사는 사람들이 동쪽 끝에 있는 동리 이름을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이곳은 조선조말 행정구역 개편전에는 밀양군 고미면(古?面)이었다.
지금은 운문면 지촌리인데 경주와 맞닿은 곳이다. 이곳엔 순흥안씨와 그리고 동래정씨와 파평윤씨들이 세거해온 곳으로 작은 동리에 속칭 재실이 넷 있다. 여기에 안쓰럽게 전해오는 얘기가 있는데 들은 대로 적어보면 이렇다. 신추재는 정하룡(鄭河龍)선생의 묘재이다. 이 분은 삼촌 즉 숙부의 등에 옆혀서 인근 영천에서 운문지촌으로 왔다고 한다. 난리 통에 자기형님이 돌아가시자 종손인 어린조카를 등에 엎고 재를 넘고 고개를 넘어 이곳으로 피난 와서 정착을 했다고 한다. 정작 자기의 어린 아들은 고향인 영천어디에 버려두고 왔는데, 고향땅에 버리고 온 어린 아들은 모진 목숨을 부지하여 부모가 있는 곳을 물어물어, 이곳으로 찾아 와 함께 살았다고 전하며 당시 어린조카였던 정하룡(鄭河龍)선생이 동래정씨의 지촌리 입청도조가 되었다고 한다. 이 분의 후손들은 상당히 높은 지위에 올랐던 분도 있다. 이분을 배향하는 재실이 바로 신추재이고 그 삼촌을 위해서 만들어진 재실이 옥천재라고 한다.
재실은 뭐 하던 곳인가? 재실은 후손들이 공부하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선조의 제사를 모시기도 하고 또 문중에 큰일을 치르거나 동네에 잔치나 초상 때 많은 사람들이 모이면 숙박을 하던 곳이라 생각하면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종손도 사람인지라 잘 살아 보려고 직장을 따라 고향을 떠나 살면 촌집은 노부모가 지키고 산다. 명절이 되면 고향도, 부모도, 자식 된 도리를 다해야 하는 종손의 책임감도 더 무거워지지나 않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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