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띠 넘구기를 해보셨나요?
그때 그 띠 넘구기를 해보셨나요?
(그 옛날 구멍가게와 신용사회)
정한호 기자 / chd0005@hanmail.net
입력 : 2014년 07월 11일(금)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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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생각하면 감히 생각할 엄두도 낼 수없는 이야기지만 당시에는 비일 비재한 일이였다. 대형마트가 생기기전 이야기이다. 지금이야 돈도 흔하고 물자도 흔한 시대이니까. 전화한통이면 무엇이던 집에까지 배달해 주지만 옛날에 돈도 없고 상점도 귀하던 시절에 큰 마을이거나 면 소재에 몇 개의 구멍가게가 있을 때. 그때를 상기하면서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를 떠올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때는 가을걷이가 끝나면 지붕이기(초가집에 짚으로 잉에를 만들어 지붕을 덮는 일)가 또 하나의 큰일이다. 안에서는 김치 담그기가 끝나면 또 메주를 끓이고 메주 끓이기가 끝나야 바야흐로 농한기가 시작되는데 농한기가 시작되면 젊은이들이 할 일이 거의 없어 고작 하는 일은 땔 나무 하는 것이 통상의 일이였다. 이맘때가 되면 가설극장이 등장을 한다. 가설극장도 하루 이틀이지 늘상 있는 일이 아니니까. 밤이 되면 농촌에서는 긴긴밤을 그냥 보내기 무료해서 마을 청년들이 하나둘 사랑방으로 모여든다. 누가 모이자고 한 것도 아니고 휴대전화나 삐삐가 없던 시절 이었으니 지금과 사뭇 달라 상상도 할 수 없는 도깨비가 나오던 시절의 이야기 이다. 겨울철 소죽을 끓인 따끈따끈한 사랑방에 저녁 먹고 나면 모이자고 약속하지 않아도 하나 둘 동네 사랑방으로 모여든다. 중 사랑이 있어도 어른이 계시는 집에는 가지 않는다. 아무래도 불편했던 모양이다. 여럿이 모인다 해도 특별히 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딱히 할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래서 그랬던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누구의 입에서라고 할 것 없이 먹기 내기 하자고 제안을 하면 모두 동의하고 이내 실행에 옮겨졌다. 먹기 내기를 하였는데 돈이 없으니 소깝(땔나무)을 해서 팔아서 주기로 하는데 실체(소깝바리)는 현재는 없지만 그래도 영 없는 것은 아니다. 아직 해놓지도 않은 소깝을 몇 짝 해서 주면 된다고 생각하고 말 하는 것이다. 자기 산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약속을 하는 것이 마치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 팔아먹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지금 생각해 보면 봉이 김선달의 사상(思想)이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왔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여 입가에는 미소가 머금어 진다.
그러면 누가 먹을 것을 사오느냐? 몫은 아이들 차지이다. 다른 방에 모여 놀고 있는 아이(당시 국민학생)들을 불러서 장터에 있는 아무씨 가게에(상점이름이 없으니 사람이름인 구멍가게)가서 빵하고 과자를 사오라고 시킨다. 그러면 아이들은 거리가 워낙 멀어서(왕복8km)혼자는 갈 수 없다 그러면 대여섯명이 함께 길을 떠난다. 산골길이라 무서워서 앞. 서거니 뒷. 서거니 하면서 공동묘지가 있는 산을 지나 다른 마을을 지나서 가게로 가면 이미 밤이 이슥해져서 도착하게 된다. 늦었지만 문을 두드리면 가게주인은 자다 말고 부시시 일어나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그러면 아무데 사는 아무가 빵하고 과자 얼마치를 사오라고 하던데요. 하면 더 묻지도 싫어하지도 않고 물건을 주섬주섬 종이봉투에(비닐 봉투 없음) 정리해서 준다. 현금이 귀하던 시절이라 돈이 없었으니 대부분 외상이다. 그래도 주인은 싫어하지도 않고 물건을 챙겨준다. 벙어리장갑도 보지 못했던 산골 중에 산골. 귀하디귀한 그 시절 소매를 길게 내려 끝을 모아 잡으면 시린 손을 감출 수 있었다. 시린 손은 막을 수 있지만 눈 쌓인 산골 칼바람은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종종걸음으로 빨리 걸으면 추위는 어느 정도 잊을 수 있으나 어두움은 손전등도 가로등도 귀하던 시절 길을 밝히는 것은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그중 가장 나이가 많은 형은 논 어귀에 쌓아놓은 짚단을 빼와 중간 중간 촘촘히 묶어 통 성냥 귀퉁이를 찢은 바닥에 다황(성냥알갱이)을 힘차게 쳐서 불을 일으켜 짚단에 불을 붙이면 훌륭한 횃불이 된다. 지금이야 라이터로 불을 켜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쉽게 불을 만들 수 있지만 당시는 비가와도 바람이 불어도 쉽지 않았다. 그렇게 만든 짚단 횃불은 길을 밝히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추위도 다소 해소해주어 불 곁으로 불 곁으로 옹기종기 모여들곤 하였다.
처음엔 장난삼아 하던 디이리지만 한사람에게 띠넘구기(떠넘기기)를 하면 처음은 이 사람에게 간다. 오기가 생기면 단가를 좀 더 높여서 다시 또 한다. 그러면 또 저 사람에게 넘어가고, 또 넘어가면서 값이 점차 높이높이 올라 나중엔 한사람에게 왕창 다 넘어가면 그야말로 큰돈이 된다. 그러다가 노름이 되었다. 당시에 우리나라의 GNP(국민총생산)가 78원이라고 할 때이니까 돈이 얼마나 귀했던가? 정부에서도 국민들에게 일을 시키고는 현금을 못주고 밀가루를 주었으니 말할 것이 있으랴? 돈을 마련할 길이라고 소깝바리(소나무가지를 잘라 땔감을 하는 것)을 해다 팔아서 돈을 갚았던 시절이다. 아이들도 어른의 흉내를 낸다고 꼴(소먹이 풀)베러 가서 꼴 따먹기를 하였다. 하는 방식은 낫꼽기(낫을 던져서 꼿히는 놀이)를 하거나 장기를 두어서 지는 아이가 이긴 아이에게 그날 벤 꼴을 모두 주는 방식이었다.
어른은 아이들의 거울이라고 말한다. 결국은 똑같이 닮아 간다는 말이 된다.
성장하는 청소년과 사랑하는 연인들 사이는 긴장이 너무 풀어져서도 안 되고 너무 탱탱하게 당겨져서도 안 된다. 모든 것은 겨울에 불같이 “불원(不遠)불근(不近)”하라는 말이 있다. ‘불은 너무 가까이 하면 데일수가 있고 너무 멀리 하면 춥다는 말이다’. 적당이라는 말인데 그 적당이 쉽지 않다.
성장하는 청소년과 연인사이에 사랑을 하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나치게 관심을 가지면 간섭이 되고 간섭이 지나치면 원수가 된다는 말이 있다. 적당이라는 말을 다시 한 번 상기하면서 지난 시절의 이야기지만 얼마나 신용사회였던가 생각하면 칼바람을 맞으면서도 그런 심부름은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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