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선조들의 삶과 우리들의 삶이 어떻게 다를까 하는 의문이 늘 마음 한 켠에 도사리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산 사람도 제대로 못 살피고 살아가는 반면에 옛 선조들은 이웃은 물론이거니와 죽은 사람들의 영혼까지도 어루만지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옛 문헌에는 어김없이 성황사와 사직단 그리고 려제단(?祭壇)이라는 것이 있다. 려제(?祭)는 흉년에 굶어 죽은 사람과 의지할 곳 없이 떠돌다 병들어 죽은 사람의 영혼이 있다고 믿고 있던 시대에 주인도 없이 외로이 구천을 헤매는 무주고혼(無主孤魂)들에게 제사를 지내 주는 것을 말한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63권에 “려(?)”조에는 정종2년에 조정에서 각 주(州)와 현(縣)에 지시하여 “려제단(?祭壇)” 설치하도록 하였다고 하니 조선초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제사를 지내는 날은 봄과 여름 가을에 있었다고 하며, 봄에는 청명일 지내고 여름에는 7월 백중날 그리고 가을에는 시월 초에 제사를 지낸다. 라고 기록은 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1년에 3번 제사를 지낸 것으로 보인다. 려제(?祭)를 시행하기 3일전에 성황당에 고(告)하여 성황신으로 하여금 북쪽에 성 밖에 설치한 려단(?壇)으로 무주고혼(無主孤魂)을 모두 모이도록하게 해달라고 고유제를 지내고 려제를 지내는 당일 날에는 술과 음식을 갖추어 신위별로 한 잔의 술과 예를 올리게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대부분 고사나 제사를 끝내고 나면 축문을 태우는데 이때는 땅속에 묻는 다고 한다. 처음에는 주인 없는 귀신이나 몽달귀신(20살 전후에 죽은 총각귀신) 처녀귀신(20살 전후에 시집못간 처녀가 죽은 귀신) 등이 갈 곳이 없어 떠돌아다니다가 주민들에게 해를 끼친다고 믿었으며 이들의 영혼을 달래어 무서운 역질(疫疾)이나 재난을 막고자 해서 생겨난 신앙의 하나였던 것으로 짐작이 되며 뒤에는 그 외에 억울하게 죽은 자들도 함께 모셨다고 알려지고 있다. 신위(神位)를 모시는 방법은 성황신(城隍神)을 단상에서 남쪽으로 향하게 하고 무사귀신(無祀鬼神)들의 신위(神位)는 단 아래에 좌우로 마주보게 했다고 하는데, 왼쪽에는 병난(兵難)에 죽은 귀신. 천재지변에 죽은 자. 도적(盜賊)에게 죽은 자, 재물도 뺏기고 목숨도 앗긴 자. 처와 첩을 강탈당하고 목숨마져 앗긴 자. 형장에서 이슬로 사라진 자. 돌림병에 죽은 자의 영혼들을 나열하였고, 오른쪽에는 맹수나 독충에 목숨을 앗긴 자. 얼어 죽은 자, 전투에서 죽은 자, 급하게 목매죽은 사람. 담장에 이나 건물에 깔려죽은 자. 지진이나 높은 곳에서 떨어져 죽은 자, 등으로 후사(後嗣)가 없어 제사를 받지 못하는 자들인데 모두 비명에 죽은 주인 없는 고혼들이다. 그러면 신과 귀신은 어떻게 다를까? 무릇 생명 있는 것이 죽으면 다음 생으로 윤회를 하게 된다고 한다. 목숨이 끊어지면 곧 바로 좋은 곳으로(극락) 가거나 나쁜 곳(지옥)으로 가거나 다른 생을 찾아서 떠나는데 갑작스레 죽음을 맞이한 생명은 죽음을 인정하지 못해 그 현장을 떠나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아다니는 중음신(中陰神)이 된다고 한다. 말하자면 죽은 자의 영혼 노숙자가 되는 데 이것은 귀신이 되고, 남을 위해서 좋은 일을 많이 했거나 남에게 존경받고 산 사람은 신(神)이 된다고 믿었다. 신(神)은 남에게 좋은 복을 줄 수 있는 영혼이고 귀신(鬼神)은 사람에게 액운을 주는 혼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이들을 위로하고 제사를 지내줌으로서 액운을 막으려고 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려제단(?祭壇)이 있었던 장소는 성의 북쪽 교외(郊外)에 만들었다고 하였으며 우리 청도는 상율림(上栗林)에 있다고 하였으니 지금의 화양읍 하천리 밤 밭이 그 곳이다. 그러나 제사를 지냈던 장소가 어디인지 정확한 위치는 알 수가 없다. 제물은 희생(犧牲)이라고 하여 돼지와 양을 사용하였다라고 전한다. 여제단은 사직단과 같이 상설된 곳이 아니고 돌로 단을 쌓아 두고 제사를 지내는 것이 보편적이었으며 제사는 관청에서 지내 주었다고 한다. 이어 사직단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기술한다면 사직단(社稷壇)은 토지신(土地神)인 사신(社神)과 곡식(穀食)의 신인 직신(稷神)에게 국가의 안녕과 농사의 풍요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말한다. 사직단의 모형은 여러 문헌에 보면 네모난 모양으로 제단(祭壇)을 만들고 주위에 담을 치고 담안에는 신실(神室)과 신문(神門)을 만들며 단은 사단과 직단을 따로 설치했다고 한다. 사단(社壇)은 동쪽에 직단은 서쪽에 설치하고 사단에는 토지의 신인 국사신주(國社神主)를 모시고 직단에는 곡식의 신인 국직신주(國稷神主)를 모셨다. 후토신(后土神)은 국사에 후직신(后稷神)은 국직(國稷)에 배향(配享)을 하였다고 하며 두 단은 모두 사방이 2장5척이고 높이가 3자이고 계단은 3단으로 설치하며 단상(壇上)에는 5색의 흙으로 덮었다고 한다. 둘러말하면 오방색(五方色)을 말하며 동은 청색 서는 백색, 남은 적색, 북은 흑색이고 중앙은 황토를 깐다. 라고 하였으나 대부분 맑고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바닥을 깨끗이 쓸고 황토로 대신하기도 하였다. 신실은 둘레에 담을 쳤으며 북향으로 배치하였고 신주는 밤나무로 마들었으며 사직위패도 역시 밤나무로 만들어 신주로 썼다. 위패는 “국사지신(國社之神)”으로 쓰고 남쪽에서 북쪽을 향하게 하였다. 사단의 배위는 “후토지신(后土之神)”으로 쓰고 신위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향하게 하였다고 하며 청도에는 진산인 오산의 중록 지금 화양읍 교촌리 성황사 서편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제사는 노천에서 지내고 혈제(血祭)라고 하며 돼지머리와 양머리를 생으로 올렸다고 한다. 제주(祭主)는 고을원이 제주가 되었으며 정월에 농사일이 시작되기 전에 사직단에 나아가 국태민안과 우리고장의 평안을 빌고 우순풍조(비는 고르게 오고 바람은 조화롭게 불어) 풍년을 이루게 해달라고 빌었다. 조선시대에는 각 고을마다 사직단과 여제단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오다가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면서 마을마다 동제로 전환된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는 전국적으로 몇 군데 그 흔적을 엿 볼 수 있는 장소가 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