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석(碑石)은? 옛 역사를 전하는 데는 비석만한 것들이 없다. 청도에서 가장 오래된 비석이라 말하라면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운문사의 원응국사 비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비석은 그 시대를 반영하는 중요한 역사서이며 증명서이다. 비석은 대개 비(碑)를 받치는 대좌(臺座)와 비문을 새기는 비신(碑身), 그리고 비신을 덮는 개석(蓋石)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대좌는 그 형상에 따라 거북의 형상을 조각한 것으로 비신을 받치기 위하여 거북이모형의 등에 직사각형 홈을 파서 끼우도록 장치한 비신 받침과 거북이가 앉아 있는 넓은 방형(方形) 지대석 위에 놓이도록 장치한 귀부(龜趺)와 네모진 형태의 대석을 갖춘 방부(方趺)로 이루어져있다. 거북이가 비신 받침으로 주로 쓰인 것은 옛 부터 거북이는 수명장존(壽命長存)을 상징하는 신령한 동물로 여겨져 비문을 후세에 영구히 전하기 위해서는 가장 적절한 상징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비신은 대개 직육면체의 방형으로 다듬어 세우며 비의 전면을 비양(碑陽), 이라하고 후면을 비음(碑陰)이라 하며 비문은 주로 비의 음양에 새긴다. 비신의 상단부에 비의 명칭을 적는데 이를 제액(題額)이라 하며 비신에 새기는 비문에는 비문을 지은 사람과 글씨를 쓴 사람의 이름을 밝히고 경우에 따라 글을 새긴 각수(刻手)와 비 건립에 참가한 사람들의 이름을 열기(列記)하기도 한다. 비석의 뚜껑에 해당하는 것을 개석 또는 관석(冠石)이라고도 하며 그 형상에 따라 이수(賂首)·가첨석(加首石)등으로 불린다. 이수란 이무기가 새겨진 개석으로 이무기는 용의 형상과 같은 상념적인 동물이지만 용은 뿔이 있으나 이무기는 뿔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중국 한대에는 용과 이무기가 공용되었으나 당대(唐代)에 와서는 이무기로 통일되었다. 우리나라는 당(唐)나라의 영향을 그대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성(城) 이나 석교(石橋)등 일반 건축의 장식 등에 이수가 사용되었다. 비석에 새겨진 이수의 형태는 여의주를 가운데 두고 한 쌍의 이무기가 마주하는 중국에 비하여 세 쌍이 뒤엉켜 있는 농주(弄珠) 형태로 전서(篆書)로 된 사각형의 전액(篆額) 주위에 빽빽히 새겨져 있다. 이수가 변형되어 단순히 이수의 윤곽만을 나타내거나 화곡(花穀)의 문양만을 새기는 것을 관석이라고도 부르며 이러한 개석은 대개 전체적으로 개화(開花)의 형태를 취하여 그 꼭지부분에 화심형(花心形)의 중심을 두는 것이 보통이다. 이수나 화관석 이외에 옥개형(屋蓋形)을 가첨석(加首石)이라고도 한다. 가첨석은 지붕의 형상을 나타낸 것으로 그 수법이 단순한 것에서 매우 정교한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조선시대에 주로 만들어졌다. - 비석의 기원과 종류 - ? 금석문(金石文)이란 쇠붙이에 글씨를 새긴 금문(金文)과 돌에 명문을 기록한 석문(石文)을 아울러 전부를 말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금석문이라는 용어로써 금속기명(金屬器銘)과 마애석각문(磨崖石刻文) · 석경(石經) · 석조물 조성기 · 석고문(石鼓文) · 석비 류 등과 넓게는 와당(瓦當)의 명문까지 금석문 속에 포함시켜 말한다. 이러한 금석의 기록물들은 그것이 새겨진 그 시대의 문화를 여러모로 직접 전하고 있다는 데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금석문의 내용이 주는 정보는 말할 것도 없고, 그 기록의 형태, 금석문에 부속된 여러 가지 문양이나 조각, 기록물의 형상과 용도 등을 미루어 그 때의 일들에 비교적 가깝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금석문의 내용은 후대에 편찬된 역사서처럼 사가(史家)에 의하여 변형되지 아니한 직접적인 자료로서 거의 움직일 수 없는 증거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러한 금석문 중에서 석비를 말할 때는 비석(碑)의 형태를 가진 돌(石)에 글자를 새겼을 때를 의미한다. 이와 같은 비석의 기원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며 그 중에는 장례(葬儀)와 관련있는 풍비(豊碑)에서 유래하였다는 설이 유력하다. 고대 중국에 장례를 치를 때에 관을 달아매어 내리기 위하여 세운 돌기둥이 풍비인데 이 풍비가 장례를 끝낸 뒤까지 남아 있어서 그 위에다가 공덕을 기록하다가 한나라(漢代)때에 와서부터는 거기에 죽은 이의 행적을 후대에 알리기 위해 새겨 놓은 데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 후 당대(唐代)에 와서 묘제(墓制)가 제정되어 5품 이상은 비(碑)라 하여 이수와 귀부를 갖추게 하였으며, 6품 이하는 갈(碣)이라 하여 원두비신(圓頭碑身)에 방형대좌만을 사용하게 하여 신분에 따라 형식을 달리 하였다. 이러한 석비의 종류에는 순수비(巡狩碑), 기공비, 신도비, 묘비, 능비 등 그 세워진 장소와 용도 · 명칭 · 비문의 내용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된다. 묘비는 진한(秦漢)시대부터 기원하여 죽은사람(死者)의 이름(名字), 가계(家系), 행적(行蹟)을 돌에 새겨 후손들에게 전하고자 묘역에 세운 것이다. 묘에 쓰인 글들은 비(碑), 갈(碣), 표(表), 지(誌) 등 4종류가 있다. 이 외에도 스님들의 탑비, 임금님의 능비와 같은 명칭으로 불리우는 것이 있고 묘갈(墓碣), 신도비와 같이 묘소 입구에 세워지는 것이 있다. 또한 죽은 사람의 신주(神主)나 신격(神格)이 모셔지는 사묘(祠廟)의 비도 사비(祠碑) · 묘정비(廟庭碑)와 같은 이름으로 불린다. 저수지(地池), 또는 궁궐, 길이나 다리(橋道) 등을 창설하거나 수축하여 그 기념으로 세우는 비는 달리 사적비(事蹟碑)로 불리기도 하는데 사찰이나 사묘(祠廟)의 증개축을 기록한 비도 여기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다. 고적에 관한 비는 대개 유허비로 불리는 경우가 많은데 유허에 단을 설치하여 고인을 향사(享祀)하기 위한 것도 있어서 어떤 것은 사묘비에 가깝고 어떤 것은 사적비에 가까운 것도 있다. 궁실이나 관사에 세워지는 비(碑)는 그 곳에 관련있는 인물의 공덕을 칭송하는 것인데 이런 비를 송덕비 · 덕정비(德政碑)라 부르기도 한다. 관아의 입구나 길가에 세워지는 이런 비석들은 불망비(不忘碑) · 선정비(善政碑) · 시혜비(施惠碑) · 거사비(去思碑) · 추모비(追慕碑) 등의 이름으로 불린다. 관장(官長)의 호의(好意)를 칭송하는 이와 같은 종류의 비석은 한때 유행처럼 되어서 부정(不淨)한 관리에게도 세워 주는 폐단을 자아내기도 하였으므로 국법에 의해 금지된 적도 있었으나 조선조 말과 대한제국 말에 수없이 세워지기도 하여 지금도 지방 곳곳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이런 비는 국가의 명령과 관계없이 지방의 아전배나 향리, 향민들에 의해 세워진 것이므로 그 이면에 숨은 향민의 애환을 미루어 알 수 있는 좋은 자료들이다. 또 특이한 사건(事件)을 기록하는 비 가운데에는 충신열사의 공덕을 기념하여 세운 기공비(紀功碑)가 있다. 대개 그 공훈과 관련 있는 곳에 세워지는 것이 많으며, 국가의 교화(敎化) 정책과 관련있는 비각으로 효자열부에게 정려(旌閭)를 내리고 그 비를 세우게 하는 효자비나 열부비 · 열녀비 등을 들 수 있다. 충 · 효 · 열 등 교화의 목적으로 세우는 비 가운데 특히 충신열사와 관련된 비는 사당이나 단소(壇所)에 부속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비석 중에는 개인의 일대기나 역사적 사건을 서술한 것 외에 법령이나 포고문 등이 새겨지는 경우도 있다. 부산 왜관에 세워졌던 약조제찰비(約條制札碑) 고종 때 전국에 세워진 척화비(斥和碑) 와 같은 것을 말한다. 이런 비석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 할 사항을 알리는 포고문의 구실을 수행하는 것으로 엄밀한 의미에서 비문이라 하기는 어려우나 중요한 사료(史料)로서의 가치를 가진다. 비의 형태에 각자(刻字)되는 내용들 중에는 단순한 표식에 불과한 것들이 있다. 하마비(下馬碑)나 제명(題名) · 석표(石標) 등이 그것인데, 이런 비석에서는 비문이 없으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비라 하기 어렵다. 비석에다 개인적인 감정을 읊은 시나 산문 등을 새기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기념비의 영역에 포함시킬 수도 있으나 본질적으로 비문의 문체는 아니므로 따로 취급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형식의 비로서는 시비(詩碑)와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